실제 역사는 사료로, 만약의 역사는 근거로 씁니다
한국사전쟁의 갈림길

귀주대첩에서 강감찬이 졌다면

1019년 겨울, 개경 가까이까지 왔던 거란군 10만 명이 북쪽으로 물러나고 있었습니다. 강감찬은 귀주에서 이 군대를 막아섰습니다. 이 싸움에서 고려가 졌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사건 1019년고려 · 전쟁의 갈림길조회 0댓글 02026.11.03

한국 국기고려중국 국기거란(요)

1019년 겨울, 넓은 들판과 얼어붙은 냇물, 낮은 성벽에 둘러싸인 고려의 고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풍경AI 재현도
배경1019년 겨울, 넓은 들판과 얼어붙은 냇물, 낮은 성벽에 둘러싸인 고려의 고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풍경

지친 거란 기병들이 넓은 들판을 지나 북쪽으로 향했습니다. 그 앞을 고려군이 가로막았습니다. 싸움이 끝났을 때 살아서 돌아간 거란군은 수천 명뿐이었습니다.

실제물러나는 적을 기다린 싸움

1018년 12월소배압이 이끄는 거란군 10만 명이 쳐들어옵니다. 고려는 강감찬을 상원수로 20만 8천여 명을 모읍니다.
1018년 겨울흥화진 앞 냇물을 쇠가죽으로 막아 두었다가 거란군이 오자 터뜨리고, 숨겨 둔 기병 1만 2천 명으로 공격합니다.
1019년 초거란군이 개경 가까이까지 내려왔다가 되돌아섭니다. 강민첨 등이 물러나는 적을 계속 공격합니다.
1019년 2월강감찬이 귀주에서 거란군을 크게 무찌르고 반령까지 뒤쫓습니다.
같은 들판, 흩어져 북쪽으로 달아나는 거란 기병과 뒤쫓는 고려군이 작게 보이는 장면AI 재현도
실제같은 들판, 흩어져 북쪽으로 달아나는 거란 기병과 뒤쫓는 고려군이 작게 보이는 장면

갈림길10만 명 가운데 수천 명

쳐들어온 거란군10만 명
VS
살아 돌아간 거란군수천 명

귀주에서 진 뒤 거란은 무력으로 고려를 굴복시키려던 뜻을 버렸습니다. 고려 왕이 직접 찾아오라는 요구도, 강동 6주를 돌려 달라는 요구도 다시 하지 않았습니다. 그 뒤 고려는 개경을 둘러싼 나성(바깥 성벽)을 1029년에 완성했습니다.

만약귀주에서 거란군이 빠져나갔다면

거란군이 귀주의 고려군을 뚫고 큰 피해 없이 돌아갔다고 가정해 봅니다. 거란은 이미 개경 가까이까지 다녀왔으므로 다시 쳐들어올 자신감을 얻습니다.

  • 1020년대거란이 더 큰 군대로 네 번째 침입을 준비합니다.
  • 1020년대고려가 강동 6주를 내주고 왕이 거란에 직접 찾아가는 조건을 받아들입니다.
  • 1030년대북쪽 땅을 잃은 고려는 국경 방어에 힘을 쏟느라 나라 안의 정비가 늦어집니다.
같은 들판, 거란 기병이 길게 줄지어 북쪽으로 빠져나가고 고을에서 연기가 오르는 장면AI 상상도
만약같은 들판, 거란 기병이 길게 줄지어 북쪽으로 빠져나가고 고을에서 연기가 오르는 장면

정말?그래도 쉽지 않았을 이유

①고려는 흥화진 같은 성을 지키며 거란군에게 이미 큰 피해를 주었습니다.
②거란도 먼 원정을 거듭하기에는 부담이 컸습니다.
③고려에는 20만 명이 넘는 군대를 다시 모을 힘이 있었습니다.

실제 vs 만약

실제만약
귀주 싸움고려의 큰 승리거란군이 빠져나감
강동 6주고려가 지킴거란에 내줌
거란의 요구다시 하지 않음더 무거워짐

오늘그리고 2026년의 우리는?

좋은 갈래로 갔다면
  • 고려가 일찍 거란과 화해해 전쟁 비용을 줄였을 수 있습니다.
  • 북방과의 교역이 더 활발해졌을 수 있습니다.
  • 고려가 국경 지키기보다 나라 안 정비에 힘을 썼을 수 있습니다.
나쁜 갈래로 갔다면
  • 압록강 동쪽 땅이 오랫동안 거란의 손에 넘어갔을 수 있습니다.
  • 강감찬이라는 이름이 지금처럼 널리 기억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남아 있는 진짜 흔적강감찬이 태어난 곳으로 전해지는 서울 관악구 낙성대에는 고려 때 세운 삼층석탑이 남아 있습니다.

참고 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귀주대첩」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낙성대」 · itwiki 「귀주 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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