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희의 담판이 실패했다면
993년, 거란 대군이 고려로 쳐들어왔습니다. 서희는 칼 대신 말로 군대를 돌려보냈습니다. 그 담판이 실패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거란 장수 소손녕은 서희에게 뜰에서 절부터 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서희는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대등하게 마주 앉았습니다.
실제말로 싸운 전쟁
993년거란(요나라)의 소손녕이 쳐들어와 봉산군을 무너뜨립니다. 조정에서는 서경(지금의 평양) 북쪽 땅을 떼어 주자는 말이 나옵니다.
같은 해고려군이 안융진에서 거란군을 막아 냅니다. 더 내려오지 못한 소손녕이 회담을 청합니다.
담판서희는 "고려는 고구려를 이은 나라"라고 맞섭니다. 여진이 길을 막아 오가지 못한다며, 여진을 몰아내면 교류하겠다고 제안합니다.
994~996년거란군이 물러납니다. 고려는 압록강 동쪽에 성을 쌓아 강동 6주의 터를 닦습니다.
갈림길땅이냐, 속셈이냐
조정 일부의 생각북쪽 땅을 떼어 주자
VS서희의 판단거란이 원하는 것은 땅이 아니다
소손녕은 80만 대군을 내세우며 항복을 다그쳤습니다. 서희는 거란의 진짜 속셈이 고려와 송나라 사이를 끊는 데 있다고 보았습니다. 고려는 송과 관계를 끊는 대신 강동 6주를 얻었습니다.
만약서경 북쪽 땅을 내주었다면
담판이 깨지고 조정이 할지론(땅을 떼어 주고 화해하자는 주장)을 따랐다고 가정해 봅니다. 실제로 조정에서 나왔던 의견이므로 엉뚱한 가정이 아닙니다.
- 994년거란이 서경 북쪽까지 차지해 고려의 국경이 대동강 가까이 내려옵니다.
- 1010년대거란이 더 많은 땅을 요구하며 다시 쳐들어옵니다. 막아 낼 북쪽 성들은 이미 거란의 손에 있습니다.
- 11세기 말고려는 압록강에 닿지 못한 채 좁은 나라로 굳어집니다.
정말?그래도 쉽지 않았을 이유
①거란도 송나라와 맞서느라 고려에만 오래 매달릴 여유가 없었습니다.
②고려군은 안융진에서 이미 거란군을 막아 낸 적이 있습니다.
③북쪽 땅을 내주면 다음 침입 때 막을 곳이 사라진다는 반대가 거셌습니다.
실제 vs 만약
| 실제 | 만약 | |
|---|---|---|
| 강동 6주 | 고려가 차지 | 거란 땅 |
| 고려의 국경 | 처음으로 압록강에 이름 | 대동강 부근 |
| 1019년 | 귀주 대첩 승리 | 싸울 발판이 좁음 |
오늘그리고 2026년의 우리는?
좋은 갈래로 갔다면
- 고려가 전쟁 대신 무역과 문화에 힘을 더 쏟았을 수 있습니다.
- 거란과 일찍 사이가 좋아져 북쪽 교류가 활발했을 수 있습니다.
- 귀주 대첩 같은 큰 전쟁이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나쁜 갈래로 갔다면
- 평안북도 일대가 오랫동안 한국사 밖에 머물렀을 수 있습니다.
- 말로 땅을 얻은 외교의 본보기가 교과서에 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남아 있는 진짜 흔적서희의 묘는 경기도 여주시 산북면에 있으며,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참고 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안융진」 · itwiki 「서희의 외교 담판」 · 경기일보 서희 장군 묘 관련 기사(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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