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역사는 사료로, 만약의 역사는 근거로 씁니다
사건사고참사와 교훈

남영호가 정원과 짐 무게를 지켰다면

1970년 12월 15일 새벽, 제주 서귀포를 떠나 부산으로 가던 여객선 남영호가 남해에서 침몰해 320명이 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정원과 짐 무게를 지켰다면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사건 1970년재난과 사고 · 참사와 교훈조회 0댓글 02026.11.06

한국 국기대한민국

높은 곳에서 넓게 내려다본 1970년 겨울 오후의 서귀포 작은 항구, 돌담으로 둘러싸인 포구에 정박한 작은 목선과 철선 연안 여객선, 검은 현무암 해안과 귤밭, 멀리 눈 덮인 한라산, 아주 작은 사람들AI 재현도
배경높은 곳에서 넓게 내려다본 1970년 겨울 오후의 서귀포 작은 항구, 돌담으로 둘러싸인 포구에 정박한 작은 목선과 철선 연안 여객선, 검은 현무암 해안과 귤밭, 멀리 눈 덮인 한라산, 아주 작은 사람들

1970년 12월, 제주의 감귤을 뭍(육지)으로 보내는 철이었습니다. 서귀포항에는 부산으로 갈 사람들과 귤 상자가 가득했습니다.

실제겨울 바다의 남영호

12월 14일 오후약 360톤의 남영호가 서귀포항을 떠나 성산포항을 거쳐 부산으로 향했습니다. 정원(300명 안팎)보다 많은 338명이 탔고, 감귤 상자 등 화물은 허가된 양의 서너 배였습니다.
12월 15일 새벽 1시 무렵전남 여수 소리도 앞바다에서 높은 파도를 만난 배가 과적(정해진 양보다 짐을 많이 싣는 것)으로 중심을 잃고 기울어 뒤집혔습니다.
구조배는 구조 신호(SOS)를 보냈지만, 여수의 무선국은 신호를 받고도 제때 알리지 않았습니다. 일본 순시선과 어선이 먼저 와서 사람을 구했고, 우리 해경은 약 14시간 만에 닿았습니다.
피해 집계해난심판원 자료로 323명, 남제주군 기록으로 326명이 숨지거나 실종되었습니다. 살아남은 사람은 12명이었습니다.
서귀포 바닷가 근처 조용한 소나무 언덕, 글씨 없는 매끈한 회색 돌 앞에 놓인 흰 국화 다발과 은은한 촛불, 멀리 잔잔한 겨울 바다, 차분하고 정중한 분위기AI 재현도
추모서귀포 바닷가 근처 조용한 소나무 언덕, 글씨 없는 매끈한 회색 돌 앞에 놓인 흰 국화 다발과 은은한 촛불, 멀리 잔잔한 겨울 바다, 차분하고 정중한 분위기

추모희생자를 기억하며

이 사고로 320명이 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거나 실종되었습니다. 시신을 찾은 분은 18명뿐이어서, 많은 가족이 끝내 작별 인사를 하지 못했습니다. 서귀포 정방폭포 근처의 위령탑에서 그날 겨울 바다에서 떠난 분들을 조용히 기억합니다.

손실사회가 잃은 것

가족과 마을

제주와 뭍의 많은 가정이 같은 날 가족을 잃었습니다. 시신조차 찾지 못한 가족이 대부분이어서 슬픔이 더 오래 남았습니다.

바닷길에 대한 믿음

제주와 뭍을 잇는 중요한 길이던 정기 여객선에서 큰 사고가 나자, 바닷길 안전에 대한 믿음이 크게 흔들렸습니다.

구조 체계에 대한 믿음

구조 신호가 제때 전달되지 않았고 이웃 나라 배가 먼저 구조에 나섰다는 사실은 국민에게 큰 실망을 주었습니다.

갈림길허가된 짐과 실제 짐

허가된 화물약 130~150톤
VS
실제 실은 화물약 500톤 넘게

지나친 과적은 침몰의 가장 큰 원인으로 꼽혔습니다. 그러나 출항 전에 짐과 사람을 제대로 세는 단속은 없었습니다. 구조 신호를 놓친 일로 기소된 공무원과 해경 4명은 재판에서 모두 무죄를 받았습니다.

만약정해진 무게만 실었다면

남영호가 정원과 허가된 화물량만 싣고 떠났다고 가정합니다. 이미 있던 기준을 지키는 일이라 엉뚱한 가정이 아닙니다.

  • 1970년 12월 15일 새벽배는 높은 파도에 흔들리지만 중심을 지키며 남해를 건넙니다.
  • 12월 15일 낮승객들은 부산항에 내리고, 감귤은 뭍의 시장으로 갑니다.
  • 그 뒤다만 귤철마다 짐을 더 싣고 싶은 유혹은 그대로 남습니다.
같은 서귀포 항구를 같은 구도로 내려다본 지금의 모습, 현무암 방파제 안에 쉬고 있는 하얀 배들과 고깃배, 귤밭과 낮은 집들, 멀리 한라산, 평온하게 오가는 작은 사람들AI 상상도
만약같은 서귀포 항구를 같은 구도로 내려다본 지금의 모습, 현무암 방파제 안에 쉬고 있는 하얀 배들과 고깃배, 귤밭과 낮은 집들, 멀리 한라산, 평온하게 오가는 작은 사람들

정말?그래도 쉽지 않았을 이유

①귤철에는 짐을 많이 실을수록 돈을 더 버는 구조였습니다.
②출항 전에 짐과 승객을 세는 단속이 허술했습니다.
③제주와 뭍을 잇는 배가 적어 사람과 짐이 한 배에 몰렸습니다.

실제 vs 만약

실제만약
화물허가량의 서너 배허가량 이내
승객338명정원 이내
인명 피해323~326명 사망·실종없음

오늘그리고 2026년의 우리는?

좋은 갈래로 갔다면
  • 그날 떠난 300여 명이 가족과 함께 오늘을 맞았을 수 있습니다.
  • 제주의 많은 집이 같은 날 가족을 잃는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 12월 15일이 제주의 슬픈 날로 남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쁜 갈래로 갔다면
  • 과적 단속이 약한 채로 다른 배에서 같은 위험이 생겼을 수 있습니다.
  • 실제로 과적과 늦은 구조 문제는 그 뒤 서해훼리호와 세월호 사고에서도 다시 드러났습니다.

지금 남아 있는 진짜 흔적1971년 3월 서귀포항에 세운 '남영호 조난자 위령탑'은 두 차례 자리를 옮겨, 2014년 12월 15일 서귀포 정방폭포 근처에 새로 세워졌습니다.

참고 자료 뉴시스 「[남영호 침몰 50주년] 세월호와 판박이… 참사 전후 국가는 없었다」(2020) · 뉴스토마토 「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 60화 – 바다가 목격한 시간들」 · 프레시안 남영호 사고 관련 기사 · Wikipedia "Sinking of Namyoung-Ho"

이어서 읽을 이야기

희생자를 기억하며 국화 한 송이를 놓아 주십시오.

첫 국화를 놓아 주십시오

댓글 0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첫 댓글을 남겨 주십시오.

?닉네임은 자동으로 붙습니다로그인 없이 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