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졌다면
1597년 가을, 조선 수군에게 남은 배는 겨우 13척이었습니다. 이 싸움에서 졌다면 전쟁은 어떻게 흘러갔겠습니까?
해남과 진도 사이의 좁은 바닷길 울돌목에 거센 물살이 울며 흘렀습니다. 그 물길 너머로 일본 배들이 줄지어 몰려왔습니다.
실제두 달 만의 반전(음력)
1597년 7월칠천량 해전. 원균이 이끈 조선 수군이 크게 지고, 원균도 전사합니다. 배설이 배 12척을 이끌고 겨우 물러납니다.
같은 달조정이 백의종군(벼슬 없이 군대를 따름)하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수군 총사령관)로 임명합니다.
9월 16일명량 해전. 울돌목의 물살을 이용해 일본 배 31척을 깨뜨리고 적 함대를 물리칩니다.
1598년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일본군이 물러납니다. 11월 노량 해전에서 이순신이 전사합니다.
갈림길열 배가 넘는 차이
조선 수군13척
VS일본 수군133척
울돌목은 가장 좁은 곳의 폭이 293m에 불과합니다. 그 좁은 물길에서는 배가 많은 쪽이 한꺼번에 밀고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이 승리로 일본 수군이 서해를 따라 올라가는 길이 막혔습니다.
만약울돌목이 뚫렸다면
이순신의 배들이 버티지 못하고 일본 함대가 울돌목을 지났다고 가정해 봅니다. 일본은 바닷길로 서해를 따라 올라가 육군을 도울 생각이었습니다.
- 1597년 겨울일본 배들이 서해를 따라 한강 어귀까지 올라옵니다. 육군에 식량과 병력이 곧바로 전해집니다.
- 1598년한양이 다시 위협받고, 명나라 군대는 바다와 땅 양쪽에서 싸워야 합니다.
- 그 뒤일본이 남쪽 몇 도를 차지한 채 긴 협상이 벌어집니다.
정말?그래도 쉽지 않았을 이유
①명나라 육군이 이미 조선에 와 있었습니다.
②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듬해 죽습니다. 일본의 전쟁 의지도 함께 꺾였을 수 있습니다.
③조선 각지의 의병과 관군이 계속 맞서 싸웠습니다.
실제 vs 만약
| 실제 | 만약 | |
|---|---|---|
| 1597년 9월 | 13척으로 승리 | 조선 수군 전멸 |
| 서해 바닷길 | 조선이 지켜 냄 | 일본 배가 마음대로 오감 |
| 전쟁의 끝 | 1598년 일본군 철수 | 더 길고 큰 피해 |
오늘그리고 2026년의 우리는?
좋은 갈래로 갔다면
- 질 뻔한 싸움을 버텨 낸 다른 영웅의 이야기가 교과서에 실립니다.
- 수군을 다시 키우는 일이 더 일찍 나라의 큰일이 됩니다.
- 광화문 광장의 동상이 다른 인물이었을 수 있습니다.
나쁜 갈래로 갔다면
- 남해안과 서해안이 오랫동안 전쟁터로 남습니다.
- 조선 땅 일부가 일본에 넘어가 국경이 지금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지금 남아 있는 진짜 흔적해남 우수영(문내면)에는 1688년에 세운 명량대첩비가 지금도 서 있으며,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참고 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명량」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칠천량해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해남 명량대첩비」 · Wikipedia "Battle of Myeongny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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