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현세자가 왕이 됐다면
청나라에서 8년을 보낸 세자가 새로운 세상을 보고 돌아왔습니다. 그가 왕이 됐다면 조선은 어떻게 달라졌겠습니까?
1645년 봄, 소현세자는 심양과 북경에서 보고 들은 것을 안고 한양에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인조의 얼굴은 차가웠습니다.
실제돌아온 지 두 달
1637년병자호란에서 진 뒤, 세자는 아내 강빈, 아우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 심양으로 볼모(인질)가 되어 끌려갑니다.
1644년북경에 70여 일 머물며 예수회(가톨릭 수도회) 선교사 아담 샬과 사귑니다. 서양 학문과 천주교를 접합니다.
1645년 음력 2월 18일한양으로 돌아옵니다.
1645년 음력 4월 26일병이 난 지 나흘 만에 숨집니다. 실록에는 시신이 검게 변했다는 기록이 남아 독살 의혹이 이어집니다.
갈림길손자 대신 아우
원래 이어질 사람소현세자의 맏아들
VS실제로 이은 사람봉림대군(효종)
인조는 세자의 맏아들 대신 봉림대군을 새 세자로 세웠습니다. 1646년 3월에는 강빈이 사사(임금이 내린 사약으로 죽음)되었습니다. 세 아들은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그중 두 아들이 끝내 목숨을 잃었습니다.
만약소현세자가 회복했다면
세자가 병을 이겨 내고 인조의 뒤를 이었다고 가정합니다. 그는 20년 전에 이미 세자로 정해진 사람이어서, 왕위에 오르는 것이 원래의 순서였습니다.
- 1650년 무렵북경과 교류를 넓혀 서양 책과 역법(달력 계산법)을 들여옵니다.
- 1660년대청나라를 치자는 주장보다 무역과 실리를 앞세웁니다.
- 1700년대실학(현실에 쓰이는 학문)이 수십 년 일찍 힘을 얻습니다.
정말?그래도 쉽지 않았을 이유
①많은 신하가 청나라를 오랑캐로 보고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앞세웠습니다.
②서양 학문을 읽고 가르칠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③청나라와 가깝다는 사실 자체가 반대파의 공격거리였습니다.
실제 vs 만약
| 실제 | 만약 | |
|---|---|---|
| 1645년 | 세자 급사 | 세자 회복 |
| 다음 왕 | 봉림대군(효종) | 소현세자 |
| 청나라를 보는 눈 | 겉으로 섬기며 반감이 큼 | 교류와 실리를 앞세움 |
오늘그리고 2026년의 우리는?
좋은 갈래로 갔다면
- 천문학과 수학 같은 학문의 뿌리가 더 깊었을 수 있습니다.
- 청나라와의 무역 길목 도시들이 일찍 커졌을 수 있습니다.
- 천주교가 박해보다 교류의 기억으로 먼저 남았을지 모릅니다.
나쁜 갈래로 갔다면
- 청나라에 너무 기댄다는 비판으로 나라 안이 갈라졌을 것입니다.
- 궁궐 안의 다툼이 더 큰 피바람으로 번졌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 남아 있는 진짜 흔적소현세자의 무덤인 소경원은 지금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 안에 있습니다.
참고 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소현세자」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민회빈 강씨」 · Wikipedia "Crown Prince Sohy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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